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평양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의 친[[중국국민당]] 성향과 일본과의 갈등 === 대량학살이 일어난 평양은 조선에서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의 친중국국민당 성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평양 중화상회가 주최가 되어가지고 동일 오전 여덟시부터 부내 총상회사무소에서 청천기 게양식을 거행하였다. 회집자는 약 60여명 으로 각 상점 부분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동회회장 왕수정씨의 강설과 소학교 교장 곽곤씨의 삼민주의에 대한 연설과 북벌 성공 만세를 제창하였다. 구 시가 방면의 중국인의 집에는 모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였다.(「단오에 擧行된 靑天旗 揭揚式 『중외일보』1928년 6월 24일.) > >'''평양 중화상회의 중심인물들은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친 국민당 성향의 행사를 주최했으며 일반 화교들 역시 가정에 청천백일기를 달아서 친 국민당적성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국민당 입당자 수가 아주 적었던 1928년 시점의 기사로서 평양 화교의 친 국민당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1928년까지 조선 전체의 중국국민당 입당자는 545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경성에 중국국민당 주조선직속지부가 만들어지고 입당자의 수가 본격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양 화교 사회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 화교 사회에는 경제적 이익을위해 친일 성향을 보인 화교도 일부 존재했던 것 같다. 야채상 왕옥이 이끌었을평양 ‘소채 조합 기성회’ 결성식에 일본인 평양 경찰서장 현하좌등이 참석하고 회칙을 작성해줬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 >야채상 왕옥을 중심으로 친일 반 국민당 성향의 화교인사는 힘을 결집하여 친 국민당 성향의 지도부를 몰아내고 1929년 평양 화교 상회의 주도권을 탈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는 군산 화교 사회에서도 보인다. 군산 중화상회장 선거에서 친일 성향의 우씨가 관공서 일본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중화상회장에 당선된 사례가 있었다. 그가 당선되자 군산 화교 사회의 오랜 염원이었던 화교 소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중화상회장을 뽑는 것이 선거를 통해 이뤄지며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일본인들이 개입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옥 계열은 중화상회를 탈환한 뒤 관공서의 일본인과 연계해 기존 평양 화교 사회의 친 국민당화를 저지하려하였을 것이다. > >1929년은 동북 역치로 중국국민당 중심의 중국통일이 완성된 시기였다. 그래서 평양의 친 국민당세력은 애국적 행사로서 손문 위령제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친일 반 국민당적 성향의 왕옥 계열의 화교들과 마찰이 발생하였고 결국 왕옥이 중화상회장 자리에서 면직되면서 평양의 친 국민당적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이후 '''평양 화교 사회는 국민당화에 대한 반발을 딛고 친 국민당적이고 애국적인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1929년 11월에 평양에 거주하는 화교 유지 뿐 아니라 일반 노동자까지도 러시아 중국 국경의 군대 위문대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신흥 중국의 국위 선양의 기회로 생각해 푼푼전전이 눈물을 흘려가며 모금했다'''고 한 데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이러한 '''평양 화교 사회지도부의 반일 친 국민당화'''는 1931년 화교 배척 사건 당시 평양 경찰 측에서 화교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 >박홍우, 2017, 「1931년 화교 배척 사건과 평양 화교 사회」,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p.15-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